한국인 최초로 UN산하 국제기구장을 지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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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욱 서울대학교 명예박사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사는 마을에서 시작한 봉사,
남태평양의 외진 나라 사모아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얻은 별명
'아시아의 슈바이처'
일본 센다이의 국제학술대회에서 한센병에 대한 연구를 인정받고 WHO 한센병 자문관, 서태평양 지역사무처 질병예방 및 관리국장을 거치고 1994년 WHO 예방백신국장을 맡게 된 이종욱 박사
'소아마비와의 전쟁'을 선포,
소아마비 유병률을 세계인구 1만 명당 1명 이하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올려 ‘백신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브룬틀란 WHO 사무총장의 특별보좌관으로 지명되었고, 2000년 12월에는 결핵국장에 임명되었다.
국제의약품기구를 설립함과 동시에 결핵퇴치사업을 추진했다.
2003년 브룬틀란 사무총장의 임기가 만료되자
각국에서 지원한 80여 명의 후보와 경쟁을 벌여
,
7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WHO 제 6대 사무총장,
한국인 최초의 UN 전문기구 수장으로 선출되었고,
2004년에는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사무총장에 취임할 당시 "300만 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치료제를 보급"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하면서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수많은 이유가 있고 그럴 듯한 핑계가 생기지. 시작하기도 전에 고민만 하다간 아무것도 못 해. 옳은 일만 하면 다들 도와주고 지원하기 마련이란 걸 명심하라고."
결국은 우려대로 100만 명에게만 보급하고 나머지 200만 명에게는 보급하지 못하게 되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주변에선 다들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며, 재정지원도 늘어나지 않아.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지.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실패는 훨씬 큰 결과를 남기는 법이야.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거야."
세계를 누비면서도 비행기는 꼭 이등석을 탔다.
“일등석과 이등석은 요금 차이가 많습니다. 수행원이 많다 보면 출장비도 많이 들고요. 우리가 쓰는 돈에는 가난한 회원국이 내는
분담금도 포함되어 있어요. 먹고살기도 힘든 나라에서 세계인의 보건을 위해 쓰라고 내는 돈입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질병 퇴치를 위해 헌신한 이종욱은 2006년 5월 22일 WHO 총회 준비 중에 뇌출혈로 서거한다.
5월 24일 스위스 제네바 노트르담 성당에서 WHO 장(葬)으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한국 정부는 우리 국민으로는 처음 주요 국제기구인 WHO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이종욱을 기리기 위해 2006년 5월 대한민국 국민훈장 가운데 최고등급인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명복을 빕니다
이종욱 서울대학교 명예박사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사는 마을에서 시작한 봉사,
남태평양의 외진 나라 사모아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얻은 별명
'아시아의 슈바이처'
일본 센다이의 국제학술대회에서 한센병에 대한 연구를 인정받고 WHO 한센병 자문관, 서태평양 지역사무처 질병예방 및 관리국장을 거치고 1994년 WHO 예방백신국장을 맡게 된 이종욱 박사
'소아마비와의 전쟁'을 선포,
소아마비 유병률을 세계인구 1만 명당 1명 이하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올려 ‘백신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브룬틀란 WHO 사무총장의 특별보좌관으로 지명되었고, 2000년 12월에는 결핵국장에 임명되었다.
국제의약품기구를 설립함과 동시에 결핵퇴치사업을 추진했다.
2003년 브룬틀란 사무총장의 임기가 만료되자
각국에서 지원한 80여 명의 후보와 경쟁을 벌여
,
7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WHO 제 6대 사무총장,
한국인 최초의 UN 전문기구 수장으로 선출되었고,
2004년에는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사무총장에 취임할 당시 "300만 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치료제를 보급"하겠다는 공약을 제시하면서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수많은 이유가 있고 그럴 듯한 핑계가 생기지. 시작하기도 전에 고민만 하다간 아무것도 못 해. 옳은 일만 하면 다들 도와주고 지원하기 마련이란 걸 명심하라고."
결국은 우려대로 100만 명에게만 보급하고 나머지 200만 명에게는 보급하지 못하게 되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주변에선 다들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며, 재정지원도 늘어나지 않아. 시작하기도 전에 포기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지. 시작하지 않는 것보다 실패는 훨씬 큰 결과를 남기는 법이야.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거야."
세계를 누비면서도 비행기는 꼭 이등석을 탔다.
“일등석과 이등석은 요금 차이가 많습니다. 수행원이 많다 보면 출장비도 많이 들고요. 우리가 쓰는 돈에는 가난한 회원국이 내는
분담금도 포함되어 있어요. 먹고살기도 힘든 나라에서 세계인의 보건을 위해 쓰라고 내는 돈입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질병 퇴치를 위해 헌신한 이종욱은 2006년 5월 22일 WHO 총회 준비 중에 뇌출혈로 서거한다.
5월 24일 스위스 제네바 노트르담 성당에서 WHO 장(葬)으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한국 정부는 우리 국민으로는 처음 주요 국제기구인 WHO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이종욱을 기리기 위해 2006년 5월 대한민국 국민훈장 가운데 최고등급인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다.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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